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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구보다도 축복받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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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월호 2024년 3월호 행동하는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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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세를 맞아 돌아보니 아름다웠다

‘그 누구보다도 축복받은 사람’

100세를 맞아 돌아보니 아름다웠다


베스 토머스, 아서 위버

1923년 11월 29일 늦은 시각, 미국 위스콘신주 베델 고등학교 남학생 기숙사. 사감인 어니스트 위버와 그의 아내이자 보건 교사인 올리브는 아들 윌러드가 세상에 나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아서의 한 살 반 된 누나 윌마는 그날 밤 집에서 아이가 태어나는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다행히도 알지 못한 채 옆방에서 조용히 자고 있었다.    

아서가 생후 6개월이 되었을 때 어니스트는 미국 일리노이주 셰리던에 있는 폭스리버 고등학교 교장직을 수락하고 7년 동안 교장으로 일했다. 아서가 7살이었을 때 어니스트는 다시 공부하기 위해 앤드루스 대학교의 전신인 이매뉴얼 미셔너리 대학에 들어갔다.

대학을 졸업한 어니스트는 숫자가 늘어난 가족을 데리고 미국 미시간주 이서카로 이사했는데 근처에 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가 있었다. 어니스트는 아이들에게 기독교 교육을 시켜 주고 싶어서 비용 마련을 위해 돈을 있는 대로 긁어모았다. 이서카로 이사 간 지 1년 뒤에 어니스트는 미시간주 홀리에 있는 어델피언 고등학교 교장으로 와 달라는 연락을 받는다. 그렇게 해서 아서는 홀리 교회 학교에 4학년으로 들어갔다. 


어릴 적에 품은 열망 

아서는 어릴 때부터 의료 선교사가 되고 싶었다. 이게 다 부모가 자신에게 선교 사업 이야기를 읽어 준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1941년 9월, 이매뉴얼 미셔너리 대학에 의예과 학생으로 들어갔다. 같은 해 10월, 국가로부터 제2차 세계 대전 징집 통보를 받았다. 

1942년 1월 미국 텍사스주에 있는 바클리 부대에서 수백 명의 다른 청년과 함께 기초 군사 훈련을 받았다. 장교 훈련 학교에 가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지만 그렇게 하면 무장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 제안을 거절했다. 기초 군사 훈련을 다 마치기 전에 차출되어 콜로라도 피츠시몬스 종합병원에서 약학 훈련을 받았다. 그곳에서 다양한 연고와 기침약 조제법을 배웠다.

약학 과정을 책임지는 대위에게서 이 과정이 주 6일로 운영된다는 설명을 듣고 아서는 토요일에는 참석할 수 없다고 말했다. 대위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 과정을] 끝까지 마치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들어 보는 게 어떻겠나?” 천우신조로 대위가 일요일마다 실험실 열쇠를 건네주어 아서는 토요일분 과제를 수행할 수 있었다. 3개월 뒤 아서는 1등으로 이 과정을 마치고 5천 명이 있는 바클리 부대에서 최우수 군인으로 선정되었다.

이후 피츠시먼스 병원에서 미국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로 파견됐다. 육군이었지만 2년 반 동안 배를 타고 태평양 전역을 다니며 병력을 전투 지역으로 실어 나르거나 다시 데리고 오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렇게 태평양 지역에서 군대 수송 임무를 수행하던 중 첫 번째 휴가를 받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휴가 중 어느 날 밤을 아서는 이렇게 회상했다. “부모님 집 거실 불빛이 어두워서 바로 그때 여자 친구인 내털리 휘커에게 청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숨을 깊이 들이쉬고 물었죠. ‘내털리, 평생 나를 위해 요리해 줄래요?’ 그러자 내털리가 대답했어요. ‘그럼요. 꼭 그렇게 하고 싶어요.’” 1945년 6월 26일 아서가 두 번째 휴가를 나왔을 때 두 사람은 결혼했다.    

아서는 1945년 11월 미 육군에서 명예 제대하고 북부 캘리포니아에 있는 퍼시픽유니언 대학 의예과에 들어갔다. 3년 동안만 다니고 로마린다 대학교의 전신인 의료 선교 대학교에 입학했다. 1952년에 졸업하자마자 가족과 함께 미시간으로 다시 이사 와서 인턴과 레지던트 과정을 이수하고 5년 동안 외과 개인 병원을 운영했다.


즐겨 섬기는 종

1960년 여름, 아서는 대총회로부터 파키스탄 카라치에서 의료 선교사로 봉사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어린 시절의 꿈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11월, 당시 12세 미만이던 자녀 6명을 포함한 아서의 가족이 배를 탔다. 가재도구도 배에 싣고 한 달 뒤인 1962년 1월 1일 카라치에 도착했다.

그때를 아서는 이렇게 회고한다. “당시 국내 최고의 병원으로 여겨졌던 카라치 재림교회 병원의 수석 외과 의사로 파키스탄에서 보낸 5년은 제 인생을 통틀어 가장 보람되고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우리 가족에게는 엄청난 축복이었죠."

1966년에 아서 부부는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아서는 미시간 디트로이트에 있는 웨인 주립대학교 교수가 되었고, 32년 동안 재향 군인 병원과 디트로이트 의료 센터에서 수술을 가르치면서 수많은 금연 클리닉을 운영했다.

1998년 75세 나이로 은퇴한 후 더 많은 시간을 사역에 투자할 수 있었다. 수년 동안 아서와 그의 친구 딕 레인이 마라나타 선교 여행을 조직해 중남미에 여러 교회를 세웠다. 아서 부부가 발 벗고 나서 미시간합회의 오서블 야영장에서 연례 건강 수련회를 기획해 사람들이 금연하고 건강과 생활 방식을 전반적으로 개선하도록 도왔다. 아서 부부는 동네에서 환대를 베풀기로 유명했다. 

1978년 『미니스트리(Ministry)』 12월 호에 실린 아서 부부 관련 기사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위버 박사는 디트로이트 지역에서 널리 알려진 5일 금연 학교를 여러 차례 개최했다. 또한 건강한 삶을 지향하는 위버 부인은 본인이 운영하는 요리 학교를 중심으로 한 채식 요리로 명성이 자자해 디트로이트의 신문, 라디오, TV 방송에 가끔 소개되었다. 이를 통해 관심이 생긴 사람들을 위버 박사 부부는 집으로 초대해 식사를 함께하기 시작했다. 몇 주에 걸쳐 사람들(저녁마다 한 명 이상)을 집으로 초대했다. 그런 다음 그들에게 전화를 걸어 (뷔페 식사가 연상되는) 초교파적인 성경 스터디 그룹에 들기를 권했다. 이 스터디 그룹에 참여한 여러 명이 침례를 받았다. 위버 박사 부부는 누구에게도 침례 받아야 한다고 부담을 주지 않으려 신경 썼다. 그러다 보니 침례 받겠다는 결정을 내리지 않은 사람도 편안한 마음으로 스터디 그룹 활동을 할 수 있었다. 거기다 연구 주제 대부분도 구성원이 직접 선택하기에 성경 공부를 멈추지 않게 되면서 주님께서 계속하여 그들의 마음에 역사하셨다.”*

 2016년 크리스마스 직후에 72년간 아서의 헌신적인 배우자였던 내털리가 복부 문제로 한 달 동안 입원했다가 별세했다. 2018년에 아서는 미망인 메리 루 포드 슈타인베크와 결혼했다.

2023년 11월, 가족과 친구들이 아서의 100번째 생일을 기쁜 마음으로 축하해 주었다. 아서는 자신의 놀라운 삶을 되돌아보며 웃으면서 말했다. “무엇보다 하고 싶은 말은 내가 그 누구보다도 축복받은 사람이라는 것이네. 처음부터 끝까지 이렇게 오래 보람 있게 잘 살고 있는 게 다 하나님 덕분이지.” 아서와 메리 루는 여전히 우편으로 교도소 사역을 하며 활발하게 봉사하고 있다.

아서가 남긴 봉사의 유산은 의사, 의사 보조사, 사회복지사, 치위생사, 물리 치료사, 간호사, 교육자인 자녀와 손자들에게까지 고스란히 이어졌다.

https://www.ministrymagazine.org/archive/1978/12/mealtime-evangelism


아서 위버 미시간에 거주하는 은퇴 의사, 교육자, 선교사이자 작가이다. 베스 토머스 『애드벤티스 리뷰』 사역 부편집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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